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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레테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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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그레테 1세는 1353년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의 딸로 태어나 1363년 노르웨이 국왕 호콘 6세와 결혼했다. 그녀는 1375년 덴마크 왕이 된 아들 올라프 2세를 대신하여 섭정이 되었으며, 호콘 6세가 사망한 후 노르웨이의 섭정 역할도 수행했다. 올라프 2세가 사망한 후에는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을 통합하는 칼마르 동맹을 결성하여 북유럽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으며, 1412년 사망할 때까지 이 동맹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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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53년 출생 - 길재
    길재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유학자이자 문신으로, 삼은 중 한 명이며 성리학적 학문을 실천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으나 조선 건국 후 관직을 거절하며 사림파 학통 형성에 영향을 미쳤고, 『야은집』 저술 및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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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레테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마르그레테 1세의 묘비에 있는 1423년 조각상
마르그레테의 무덤에 있는 1423년 조각상, 로스킬레 대성당, 덴마크
다른 이름Margrete I
출생일1353년 3월
출생지쇠보르 성, 덴마크
사망일1412년 10월 28일 (향년 59세)
사망지슐레스비히, 덴마크, 플렌스부르크 항구의 배 안
매장지로스킬레 대성당, 셸란, 덴마크
통치
칭호덴마크 여왕
재위 기간1387년 8월 10일 – 1412년 10월 28일 (에리크와 공동 통치)
선임자올라프 2세
후임자에리크 폰 포메른 (단독 통치)
섭정에리크 폰 포메른 (1396년부터)
칭호 유형공동 통치자
칭호2노르웨이 여왕
재위 기간21388년 2월 2일 – 1412년 10월 28일 (에리크와 공동 통치)
선임자2올라프 4세
후임자2에리크 폰 포메른 (단독 통치)
섭정2에리크 폰 포메른 (1389년부터)
칭호 유형2공동 통치자
칭호3스웨덴 여왕
재위 기간31389년 2월 24일 – 1412년 10월 28일 (에리크와 공동 통치)
선임자3알브레히트
후임자3에리크 폰 포메른 (단독 통치)
섭정3에리크 폰 포메른 (1396년부터)
칭호 유형3공동 통치자
칭호4덴마크 섭정
재위 기간41376년 5월 3일 – 1387년 8월 3일
칭호 유형4섭정
섭정4올라프 2세
칭호 유형5군주
칭호5노르웨이의 왕비
재위 기간51363년 4월 9일 – 1380년 9월 11일
칭호 유형6임기
칭호6스웨덴의 왕비
재위 기간61363년 4월 9일 – 1364년 2월 15일
칭호 유형7임기
가족
배우자호콘 6세 (1363년 결혼, 1380년 사망)
자녀올라프 2세
가문에스트리센 가문
아버지발데마르 4세
어머니헬비히 폰 슐레스비히

2. 생애

1353년 덴마크발데마르 4세 국왕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1363년 노르웨이호콘 6세 국왕과 결혼하였다. 1375년 아버지가 죽자 아들 올라프 2세를 덴마크 왕위에 앉혔고, 다섯 살에 불과했던 올라프를 대신해 섭정이 되었다. 1380년 호콘 6세가 죽자 올라프 2세는 노르웨이의 올라프 4세로 즉위했고, 마르그레테는 덴마크와 노르웨이 양국의 섭정으로서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1387년 올라프 2세가 요절하자, 마르그레테는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차기 국왕을 선출할 권한을 얻었다. 그녀는 언니의 손자인 포메라니아의 에리크를 노르웨이의 에리크 3세로 즉위시켰고, 이후 덴마크의 에리크 7세, 스웨덴의 에리크 13세로 즉위시켰다. 이를 통해 덴마크를 중심으로 하는 북유럽 3국의 국가 연합이자 동군연합칼마르 동맹이 성립되었으며, 이 연합은 1523년까지 지속되었다.

마르그레테는 플렌스부르크 항구에 정박한 배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21]

2. 1. 초기 생애와 결혼

1353년 덴마크발데마르 4세 국왕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1363년 노르웨이호콘 6세 국왕과 결혼하였으며, 1375년 아버지가 죽자 아들인 올라프 2세를 덴마크의 왕위에 앉혔다. 올라프는 당시 다섯 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녀가 섭정이 되었다.

마르그레테의 부모,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4세(왼쪽)와 슐레스비히의 여왕 헬비(오른쪽), 1375.


마르그레테는 1353년 3월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4세와 여왕 헬비의 여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1] 쇠보르 성의 감옥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아버지 발데마르 4세가 이미 어머니를 가두었던 곳이다.[13] 로스킬레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1359년 6세의 나이에 스웨덴-노르웨이 국왕 마그누스 4세 및 7세의 막내 아들인 18세의 호콘 6세와 약혼했다. 결혼 계약의 일환으로, 마그누스는 1356년 남부 스웨덴을 지배했던 자신의 차남 스웨덴의 에릭 "12세"와의 분쟁에서 발데마르 국왕의 지원을 받기로 합의한 조약이 체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마르그레테의 결혼은 북유럽의 권력 투쟁의 일부였다. 이 사실에 일부에서 불만이 있었으며, 정치 운동가 스웨덴의 브리짓은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합의를 "아이들이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발데마르 국왕이 결혼을 통해 얻고자 한 목표는 1332년부터 스웨덴에 담보로 잡혀 있던 스카니아를 되찾는 것이었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결혼 계약에는 헬싱보리 성을 덴마크에 반환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1359년 6월 발데마르는 대군을 이끌고 외레순을 건너 곧 스카니아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 공격은 에릭에 대항하여 마그누스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1359년 6월 에릭이 사망했다. 그 결과, 권력 균형이 바뀌면서 마그누스와 발데마르 간의 모든 합의, 마르그레테와 호콘 간의 결혼 계약을 포함하여,가 종료되었다.

그러나 발데마르는 스카니아에서 철수하지 않고, 대신 발트해의 고틀란드 섬에 대한 정복을 계속했다. 독일인들이 거주하는 비스비는 섬의 주요 도시였으며, 발트해 지배의 핵심이었다. 1361년 7월 27일, 잘 갖춰진 덴마크 군대와 현지 고틀란드 농민들이 전투를 벌였다. 덴마크인들은 전투에서 승리하여 비스비를 점령했고, 독일인들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국왕 마그누스와 한자 동맹은 이러한 도발을 무시할 수 없었고, 덴마크에 대한 무역 금수가 즉시 발효되었으며, 필요한 군사 조치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동시에 국왕 마그누스와 홀슈타인의 하인리히는 호콘과 하인리히의 여동생 엘리자베스의 결혼에 대한 협상을 시작했다. 1362년 12월 17일, 엘리자베스를 스웨덴으로 데려가는 배가 출항했다. 그러나 폭풍으로 인해 배는 보른홀름으로 향했고, 룬 대주교는 호콘이 이미 마르그레테와 약혼했기 때문에 결혼을 교회법 위반이라고 선언했다. 스웨덴과 한자 동맹 군대 또한 결국 헬싱보리 포위 공격에서 철수했다. 이후, 한자 동맹과 휴전이 체결되었고, 국왕 마그누스는 전쟁을 포기했다. 이는 당시 10세였던 마르그레테와 호콘 국왕의 결혼이 다시 유효해졌음을 의미했다. 결혼식은 1363년 4월 9일 코펜하겐에서 열렸다.



호콘과 마르그레테의 결혼은 동맹이었고, 마르그레테는 결혼 후 한동안 덴마크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지만, 결국 메레테 울브스다터에게 양육을 받기 위해 오슬로 피요르의 아케르스후스로 옮겨졌다. 메레테 울브스다터는 저명한 귀족 여성이자 스웨덴의 브리짓의 딸이었으며, 마그누스 국왕의 충실한 추종자 중 한 명인 크누트 알고트손의 아내이기도 했다. 마르그레테는 메레테의 딸 잉에게르드와 함께 자랐으며, 잉에게르드는 그녀에게 종교 및 군주제에 대해 가르쳤을 가능성이 높다. 메레테의 딸인 잉에게르드와 카트린은 그녀의 가장 친한 여성 친구가 되었으며, 마르그레테는 나중에 수녀가 된 잉에게르드와 그녀의 수도원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그녀가 브리짓파를 후원한 것은 종교적 신념과 통합 과정을 돕기 위한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15] 그녀의 학문적 연구는 제한적이었을 것이지만, 그녀는 읽고 쓰는 것 외에도 통치술을 배우기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통치에 대한 초기 재능을 보였고 실질적인 권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16]

마르그레테의 결혼 이후 몇 년 동안 스칸디나비아는 일련의 주요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그녀의 결혼 몇 달 후, 그녀의 유일한 오빠인 롤란 공작 크리스토퍼가 사망하여 아버지에게 후계자가 없게 되었다. 1364년 스웨덴 귀족들은 마르그레테의 남편과 시아버지를 스웨덴 왕위에서 폐위시키고 메클렌부르크의 알베르트를 스웨덴 국왕으로 선출했다.

2. 2. 섭정과 칼마르 동맹

1375년 발데마르 4세가 사망하자, 마르그레테 1세는 5살 된 아들 올라프 2세를 덴마크 왕위에 앉히고 섭정이 되었다. 1380년 남편 호콘 6세가 사망하면서 올라프 2세는 노르웨이의 올라프 4세로 즉위했고, 마르그레테는 덴마크와 노르웨이 양국의 섭정이 되어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33][34]

1387년 올라프 2세가 요절하자, 마르그레테는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차기 국왕을 선출할 권한을 얻었다. 그녀는 언니의 손자인 포메라니아의 에리크를 노르웨이의 에리크 3세로 즉위시켰고, 이후 덴마크의 에리크 7세, 스웨덴의 에리크 13세로 즉위시켰다.

한편, 스웨덴에서는 1364년 마그누스 4세가 추방되고 알브레히트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마르그레테는 1389년 스웨덴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알브레히트를 포로로 잡고 스웨덴에 대한 우위를 확보했다.[32]

1396년 에리크를 덴마크와 스웨덴 왕으로 즉위시켜 북유럽 3국은 실질적인 동군 연합이 되었다. 1397년 마르그레테의 주도로 칼마르 동맹이 맺어지면서, 덴마크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 연합이 성립되었다. 이 동맹은 1523년 스웨덴이 독립할 때까지 유지되었으며, 마르그레테는 1412년 사망할 때까지 섭정으로서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수행했다.[32]

2. 3. 통치 정책과 외교

마르그레테는 신중한 통치 정책을 펼쳤다. 그녀는 릭스라드(국왕 자문회의)의 존재를 용인했지만, 그 영향력은 미미했고 왕권은 여전히 최고였다. 대장군과 원수 직위는 공석으로 남았고, 데네호프(덴마크의 중세 의회)는 쇠퇴했으며, "이상적인 전제 군주"[19]였던 여왕은 뛰어난 서기관 역할을 하는 궁정 관료들을 통해 통치했다. 법과 질서는 잘 유지되었고 귀족들의 방종은 엄격하게 억제되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 왕국은 덴마크 국가의 중요한 부분으로 취급되었고, 민족적 열망은 억제되거나 억눌렸지만, 노르웨이는 더 충성스러웠기 때문에 스웨덴보다 더 관대하게 대우받았다.[18]

1396년, 마르그레테는 교회(''pax dei''), 가옥, 농장, 법적 회의, 들판의 노동자, 그리고 "kvindefred"라는 단어로 표현된 여성에 대한 평화를 존중하고 시행해야 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이는 마르그레테가 사회 불안정 시기에 여성을 특히 취약하다고 인식하고, 시녀와 과부를 포함하는 ''personae miserabiles''의 보호자로서 통치자에 대한 그녀의 해석을 나타낼 수 있다.[15] 1411년, 그녀는 스웨덴과 덴마크 간의 전쟁(1388–1389) 동안 '유린되고 타락한' 여성들에게 500마르크를 분배했다.[15]

마르그레테는 발데마르 4세의 통치 이전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몰수되었던 모든 토지를 왕실로 회복시켰다. 이른바 ''레두크션''(reduktion, 환수) 또는 토지 회복은 극도의 엄격함으로 수행되었고 수백 개의 영지가 왕실의 손에 들어갔다. 그녀는 또한 덴마크 화폐를 개혁하여 오래되고 쓸모없는 구리 토큰 대신 좋은 은화를 사용함으로써 자신과 국가 모두에게 큰 이점을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항상 많은 돈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고, 그 중 많은 부분을 자선에 기부했다.

토마스 킹스턴 데리에 따르면, 마르그레테는 동맹에 건전한 경제 기반을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세 왕국의 별도 의회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대신 뛰어난 기술로 선택한 시민 및 교회의 관료 집단에 의존함으로써 그들이 지도력을 갖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녀는 스웨덴과 노르웨이 주교직에 덴마크인을 배치했으며, 왕실 영지와 성은 외국 출신의 성주와 집행관이 관리했다. 이는 스웨덴과 노르웨이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덴마크인을 승진시켰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데리는 그녀가 다른 곳보다 모국인 덴마크에서 더 많은 독일인을 고용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녀는 주로 충성스럽고 효율적인 행정을 확보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한다.[19]

그녀는 여행을 많이 다녔고, 만년에는 덴마크보다 스웨덴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녀는 세 왕국의 귀족들 사이의 혼인을 장려했다. 그녀의 신앙심은 잘 알려져 있으며, 성 브리지타의 시성을 강력하게 지원하고, 바스테나를 강력한 문화 중심지로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브리지타 언어"의 보급을 장려하여 많은 스웨덴어 표현이 덴마크인과 노르웨이인 사이에서 사용되게 했다.[19]

그녀의 모험심 강한 아버지의 외교 정책과 대조적으로, 마르그레테의 정책은 신중했고 백년 전쟁 및 기타 유럽 분쟁에서 변함없이 중립적이었다.[18] 그러나 그녀는 잃어버린 덴마크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고틀란드 섬을 실제 소유주인 알베르트 폰 메클렌부르크와 리보니아 기사단으로부터 구매했고, 슐레스비히의 대부분은 같은 방식으로 되찾았다.

1402년 마르그레테는 잉글랜드와 북유럽 동맹 간의 이중 결혼 동맹의 가능성에 대해 잉글랜드의 헨리 4세와 협상을 시작했다. 제안은 에리크 7세 왕이 헨리의 딸 필리파와 결혼하고 헨리의 아들인 웨일스 공이자 미래의 잉글랜드의 헨리 5세가 에릭의 여동생 캐서린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마크 셸에 따르면, 마르그레테의 비전은 언젠가 두 동맹이 크누트 대왕북해 제국을 재창조하기 위해 연합하는 것이었다.[20] 영국 측은 이 결혼을 통해 북유럽 왕국이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에 대항하여 개입할 수 있는 공격적 동맹을 맺기를 원했다. 마르그레테는 구속력 있는 동맹 및 외세와의 전쟁에 관여하지 않는 일관된 정책을 따랐고, 따라서 영국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이중 결혼은 없었지만, 에릭은 1406년 10월 26일 에서 헨리 4세의 딸인 13세 필리파와 결혼하여 순전히 방어적인 동맹을 체결했다. 에릭의 여동생 캐서린을 위해 노이마르크 백작 요한과의 결혼이 준비되었다. 마르그레테는 이렇게 북독일 공국과 도시들에 대한 균형추 역할을 할 수 있는 남독일 동맹을 얻었다.

2. 4. 사망

1412년 10월, 마르그레테 1세는 슐레스비히를 되찾기 위해 홀슈타인과의 전쟁을 벌이던 중, 플렌스부르크 항구에 정박한 배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21]

셸란 섬에서 배를 타고 출항한 그녀는 여러 토론에 참석하여 문제 해결에 진전을 보였으나, 항구를 떠나려던 중 "갑작스럽고 격렬한 질병"에 걸렸다.[21]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마르그레테 1세는 인근 캄펜 수도원에 자신의 영혼을 위한 영원한 미사를 위해 37 마르크를 지불하도록 명령했다.[21] 그녀의 죽음에 대한 역사적 기록에는 이 외에 다른 논의는 없다. 마르그레테 1세는 1412년 10월 28일 밤, 성 시몬과 성 유다의 전야에 사망했다.[21]

그녀의 죽음에 대한 가능한 시나리오로는 역병, 아브라함 브로더손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 또는 에릭에 의한 독살 등이 제안되었다.[22][23]

1423년 뤼베크 조각가 요하네스 융에가 제작한 그녀의 석관은 코펜하겐 근처 로스킬레 대성당의 높은 제단 뒤에 위치해 있다. 그녀는 자신의 영혼을 위한 로마 미사가 미래에도 정기적으로 거행될 것을 조건으로 대성당에 재산을 남겼다. 이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 시기인 1536년에 중단되었지만, 그녀를 기념하여 특별한 종이 매일 두 번 울린다.[21]

덴마크 로스킬레 대성당에 있는 마르그레테 1세의 정교한 무덤, 이후의 왕족 석관 근처

3. 유산과 평가

마르그레테 1세는 짙은 머리카락과 어두운 눈, 위협적인 시선, 절대적인 권위의 아우라를 지닌 아름다운 여성으로 묘사되었다.[24] 나이가 들어서도 활력이 넘치고 독단적이며 불굴의 의지를 지녔다고 한다.[24] 동시에 현명하고, 공정하며, 재치 있고, 친절하다는 평가도 받았다.[24] 허드슨 스트로드는 마르그레테 1세가 성 브리지트처럼 굴복하지 않는 남성적인 면모를 지녔으며, 건설적인 능력, 외교적 수완, 강력한 의지를 사용하여 연합을 성공으로 이끌고 왕의 특권을 유지했다고 기록했다.[26]

1388년 3월 6일자 문서에 있는 마르그레테의 노르웨이 인장, 아케르스후스. 비문에는 '마르그레테, 신의 은총으로,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여왕'이라고 적혀 있다.


덴마크에서 마르그레테는 "덴마크 왕국의 주권자이자 영주, 그리고 수호자"라고 불렸으며, 이 칭호는 지배자에게 남성, 여성, 성 중립적인 수호자의 권력과 권위를 부여했다. 1392년 에리크가 노르웨이 왕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녀는 노르웨이에서 이 칭호를 포기했고, 1396년 그가 덴마크와 스웨덴의 왕으로 즉위했을 때 이 칭호의 사용을 완전히 중단했지만 섭정으로 계속 활동했다.[27]

마르그레테 1세는 1375년에만 자신을 덴마크 여왕으로 칭했고, "마르그레테, 신의 은총으로 덴마크의 발데마르 왕의 딸", "덴마크의 정당한 상속자"라고 칭했다. 교황 보니파시오 9세는 1390년 9월 9일 서한에서 그녀를 "우리의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딸,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의 가장 훌륭한 여왕 마르그레테"라고 칭했다.[27]

1363년 노르웨이의 호콘 6세와 결혼했을 때, 마르그레테는 왕비가 되었으며, 1389년 2월 24일부터 1412년 10월 28일까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여왕이자 칼마르 동맹의 설립자였다. 덴마크에서 여성이 통치하는 것은 관습이 아니었기에 여왕 섭정으로 활동했다.[28]

덴마크 동부 로스킬레에 있는 기마상.


덴마크 비보르에 있는 마르그레테와 에릭의 동상.

3. 1. 논란

E.C. 오테는 1874년에 마르그레테 1세가 칼마르 동맹을 통해 세 왕국에 좋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세 왕국이 연합하면 한자 상인들과 독일의 모든 적들의 공격에 맞설 만큼 강해지고, 발트해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만큼 훌륭한 통치자는 없었다고 덧붙였다.[29]

임센에 따르면, 마르그레테 1세의 정치적 능력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그녀의 동기는 항상 논쟁의 대상이었다. 19세기 전반에는 독일의 영향력에 맞서 싸운 이상주의자로 묘사되었으나, 1864년 덴마크가 프로이센에 패배한 이후에는 민족주의자 이미지가 강해졌다. 이후 그녀는 권력과 왕조의 이익을 위해 싸운 마키아벨리스트로 간주되었다.[29]

스웨덴의 공화주의자 빌헬름 모베르그는 마르그레테 1세를 전쟁에 반대하는 인물로 칭송하며, 북유럽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라고 불렀다.[30] 1949년, de 교수는 마르그레테 1세가 뛰어난 정치적 재능, 힘과 인내, 유연하고 설득력 있는 협상 기술로 스웨덴과 덴마크 왕들이 성공하지 못했던 정치적 계획을 현실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30]

《중세 시대: 세계 인물 전기 사전》 제2권에서 맥패든은 마르그레테 1세가 스칸디나비아 왕국들을 통일하고 독일을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 빼앗긴 영토를 되찾았다고 평가했다. 그녀가 사망했을 때, 스칸디나비아 연합은 발트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으며,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영토를 축적한 국가였다.[30]

2021년 영화 《마르그레테: 북쪽 여왕(Margrete: Queen of the North)》(덴마크어: Margrete den Førsteda)는 마르그레테 1세의 통치, 특히 북유럽 연합 군대의 창설과 가짜 올레프를 다룬 이야기를 다룬다.[31]

참조

[1] 서적 Collier's Encyclopedia Collier's Encyclopedia 1986
[2] 서적 Women in World History, Volume 10 https://books.google[...] Gale 2000
[3] 서적 Cross and Scepter: The Rise of the Scandinavian Kingdoms from the Vikings to the Reformation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4
[4] 서적 Queenship in Medieval Europe https://books.google[...] Palgrave Macmillan 2013
[5] 서적 Drottning Margaretas historia
[6] 서적 The Second Book of History: Including the Modern History of Europe, Africa, and Asia ... : Designed as a Sequel to the First Book of History https://books.google[...] Jenks, Hickling & Swan 1852
[7] 서적 Debrett's Kings and Queens of Europe Salem House 1988
[8] 서적 1,000 years, 1,000 people: ranking the men and women who shaped the millennium https://archive.org/[...] Kodansha International 1998
[9] 서적 History of the Norwegian People. Two Volumes. Vol.II https://archive.org/[...] The MacMillan Company 1915
[10] 서적 The 100 Most Influential Women of All Time https://books.google[...] The Rosen Publishing Group 2009
[11] 서적 History of Norway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
[12] 잡지 Margrethe of Denmark – 'Best damn queen there is' https://books.google[...] Time Inc 1972-01-28
[13] 서적 Sketches in Holland and Scandinavia https://books.google[...] Cosimo, Inc. 2005
[14] 웹사이트 Margaret's letter to Haakon VI http://www.dokpro.ui[...] Dokumentasjonsprosjektet
[15] 서적 Queens and Queenship in Medieval Europe: Proceedings of a Conference Held at King's College London, April 1995 https://books.google[...] Boydell Press 1997
[16] 서적 Top 101 Remarkable Women https://books.google[...] Britannica Educational Publishing 2014
[17] 서적 Sweden, the Nation's History https://books.google[...] SIU Press 1988
[18] 웹사이트 The King Who Became a Pirate https://narratively.[...] 2020-04-20
[19] 서적 Encyclopædia Britannica: A New Survey of Universal Knowledge, Volume 14 Encyclopædia Britannica 1950
[20] 서적 Islandology: Geography, Rhetoric, Politics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4
[21] 웹사이트 Queen Margaret of Denmark, Norway, and Sweden (1353–1412). 2005 http://departments.k[...] 201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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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적 Women of Europe in the fifteenth and sixteenth centuries https://archive.org/[...] Hurst and Blackett 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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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서적 The Reformation: The Story of Civilization https://books.google[...] Simon and Schuster 2011-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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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서적 Diplomatarium Norvegicum, Volume 5 https://archive.org/[...] P.T. Malling 1861
[28] 서적 Frauen des Mittelalters in Lebensbildern Styria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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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뉴스 Review: Margrete: Queen of the North https://www.rogerebe[...] 2021-12-17
[32] 서적 2008
[33] 서적 2001
[34] 서적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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